<출판저널> 2007년 10월호-박상익의 역사읽기
왜 아메리카인가
슈테판 츠바이크 저, 김재혁 역, <아메리고>(삼우반, 2004) 8,000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대륙에는 ‘콜럼비아’가 아닌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분명 그 대륙에 가기는 했지만 처음 간 것은 아니며, 그 자신이 그 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었다. 그는 이 대륙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후대에 그는 중상모략가, 위조자, 사기꾼 등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치밀한 자료 조사로 지구 네 번째 대륙에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되는 엄청난 영광을 누린 한 사나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 대륙이 아메리카로 명명된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세계지도에 대한 모든 지식을, 특히 아메리카의 존재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달라고 주문한다. 그 시대의 어둠과 불확실성을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는 사람만이 미지의 대륙의 첫 윤곽이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맛보았을 흥분과 열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달라는 것이다.
‘갠지스 강’에 도착한 콜럼버스
서기 1000년경 유럽 세계는 몽롱한 잠에 빠져 있었다. 인구의 99퍼센트가 문맹이었다. 왕과 황제도 읽고 쓸 줄 몰랐다. 서기 1200년경 그들은 십자군원정으로 그리스도의 성묘를 되찾았다가 다시 잃었다. 그러나 헛되지만은 않았다. 이 순례를 통해 유럽은 오랜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기사와 시종들은 자신들이 유럽의 비좁은 구석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무지하고 답답하게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반면에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이 얼마나 풍요롭고 세련되게 살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슬람교도들은 아주 먼 나라까지 가서 노예와 보물들을 구해왔으며 유럽 바깥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지식을 아랍어로 번역해 습득했고, 거기에다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지식을 보태기까지 했다. 칼싸움이나 하며 흥청망청 먹고 마시던 야만적인 유럽인들은 아랍인들의 영향과 자극을 받아 연구하고 관찰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유럽 각지에 대학이 속속 생겨났다.
해방된 정신은 비좁은 유럽 바깥의 세상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눈길을 어디로 돌려도 망망한 바다뿐이었다. 유일하게 남쪽으로 이집트를 지나 꿈의 나라인 인도로 가는 길이 하나 있었으나 그 길은 이교도들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서기 1400년경에 이르러 인도에 도착하는 것, 그것은 그 세기―15세기―의 꿈이 되었다.
그것은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리케가 품었던 꿈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계피와 후추와 생강이 자라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섬에 이르고자 하는 한 가지 꿈에 매달렸다. 그런데 투르크 사람들은 그곳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목인 홍해를 차단하고 소득 많은 그 장사를 완전히 독점해버렸다. 그렇다면 유럽의 적인 그들의 뒷덜미를 치는 것은 돈벌이 되는 사업인 동시에 기독교적 순례행위가 아닐까? 왕자는 자기 주변에 당대의 학자들을 불러 모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연구했다. 왕자의 노력 덕분에 포르투갈은 선두에 섰다. 1486년 바르톨로뮤 다아스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았다. 그 뒤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캘커타까지 도달했다.
누구도 포르투갈을 앞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1492년 콜럼버스가 에스파냐 깃발을 달고서 아프리카를 거치지 않고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짧은 길’을 통해 ‘인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맨 먼저 지팡구(일본)로 갔고 이어서 중국 남부에 도착했으며 단 며칠간의 여행 끝에 갠지스 강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대양을 3주 정도만 서쪽으로 항해하면 중국이나 일본에 갈 수 있었으니, 남쪽으로 아프리카를 돌아 6개월 이상 항해를 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얼마나 바보들인가.
‘신세계’에 대한 최초의 인식
1503년 유럽 여러 도시에 <신세계>(Mundus Novus)라는 제목의 팸플릿이 유포되었다. 저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 갠지스 강 근처의 섬에 도착했음을 알린 1493년 콜럼버스의 첫 번째 편지 이후 유럽에 떠돌던 모든 팸플릿들 가운데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팸플릿보다 더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은 없었다.
이 팸플릿이 중대 사건이 된 이유는 ‘신세계’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이 제목은 우주를 보는 관점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이 특이한 항해가는 자신이 서쪽으로 여행한 끝에 도착한 곳이 결코 인도가 아니며,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전혀 새로운 미지의 땅, 즉 ‘신세계’라는 놀라운 사실을 공표한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아메리카 최초의 ‘독립선언서’였다. 콜럼버스는 임종의 순간까지 쿠바를 중국 땅으로, 아이티를 일본 땅으로 착각했고, 이 착각으로 인해 동시대 사람들은 지구의 크기를 실제보다 훨씬 작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중세적 사고의 틀에 갇혀있던 그는 자신이 발견한 섬들과 육지를 자신의 고정관념에 꿰어 맞추려 했다. 여기에는 그의 중세적 신앙심도 한몫을 했다. 스콜라적 사고방식에 얽매어있던 콜럼버스는, 새로운 진리는 발견될 수 없고 단지 예부터 전해오는 진리가 확인될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베스푸치는 그 대륙이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라고 명확하게 주장했다. 베스푸치의 글이 불러일으킨 놀라움은 엄청나면서도 유쾌한 것이었다. 그 놀라움은 당대의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그 놀라움은 콜럼버스가 ‘인도’를 발견했을 때보다 훨씬 더 컸으며 오래 지속되었다.
사실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상업에 관련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갖는 관심사였다. 그러나 새로운 대륙이 대양 한가운데서 발견되었다는 베스푸치의 글은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가슴에 걷잡을 수 없는 상상력의 불길을 지폈다. 지난날 가장 현명하다고 공인되던 몇몇 사람들이 추측했던 것보다 이 세계가 훨씬 더 넓고 놀라운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지구의 궁극적인 비밀을 캐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자신들에게 주어졌다는 감정으로 인해 그 시대 사람들의 자존심은 놀라우리만큼 치솟았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반면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먼저 그것을 아메리카로, 새로운 대륙으로 인식했다. 이 한 가지 공적이 네 번째 대륙에 그의 이름을 붙인 사실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행동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행동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이 미친 역사적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최초’가 아닌 ‘역사적 영향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