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읽기

<출판저널> 2007년 6월호-박상익의 역사읽기

안티고네 2007. 5. 10. 14:17

때로는 오류가 진실을 낳는다


슈테판 츠바이크 저, 이내금 역 <불멸의 탐험가, 마젤란>(자작나무, 1996)

 

음식점 테이블마다 놓여있는 흔해빠진 후추가 12세기에 무게 당 가격이 은값과 같았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중세 서양에서 후추의 가치는 귀금속과 같았다. 후추로 땅을 사기도 했고 후추의 무게로 관세를 책정하는 제후와 자치시도 등장했다. 굉장한 부자를 가리켜 ‘후추포대’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금은을 재던 저울에 이제는 생강, 계피, 장뇌 등이 올라갔고, 행여 문틈으로 이 귀한 물건이 가루 한 톨이라도 날아갈까 하여 문이란 문은 창문까지 꼭꼭 닫아걸었다.


인도와 말라이 제도 등지에서 잡초처럼 아무데서나 자라는 계피, 정향, 후추 등이 유럽에 왔다하면 몸값이 수백 배 치솟는다. 이런 가격 폭등이 터무니없어 보일지 몰라도 당시 화물 운송에 따르는 엄청난 어려움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원산지에서 온갖 난관을 뚫고 열대 바다와 홍해와 사막을 거쳐 유럽의 최종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열두 번의 단계를 거치면서 폭리에 폭리를 거듭하는 것이다. 특히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과할 때면, 현지의 술탄들이 낙타 한 마리당 또는 자루 한 개당 세금을 물리는데,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그야말로 노상강도 수준이었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바르돌로뮤 디아스와 바스코 다 가마가 남쪽으로 대담하게 떠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세금을 물지 않고 인도를 오갈 수 있는 자유로운 항로를 찾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가로놓여 있었다. 결정적인 발명·발견에는 언제나 정신적·도덕적 동기가 추진력을 제공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지기 위해서는 물질적 자극이 필요하다.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하지 않던가. 탐험이 성공만 하면 소요 비용의 1천 배나 되는 이윤을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없었더라면 그 어떤 군주도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계획을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양으로 가는 통로를 찾아서


마젤란(1480-1521)은 포르투갈 출신으로서 포르투갈 왕을 위해 선원 생활을 하다가 국왕의 버림을 받고, 이웃 경쟁국가인 에스파냐 왕을 찾아가 그의 후원으로 콜럼버스가 이루지 못한 탐험을 하게 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콜럼버스(1451-1506)는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도’로 가기 위해 출항했다. 그러나 피사로가 1533년 잉카를 정복하기 전까지 아메리카 발견은 상업적으로는 실패였고, 황금에 굶주린 에스파냐인들은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관리하기보다는 아메리카를 돌아 원래의 목적지인 ‘보석과 향료의 낙원’에 도달하는데 더 주력했다.

에스파냐 왕의 명령으로 신대륙을 돌아 포르투갈보다 먼저 동양의 향료군도에 도달하려는 노력과 시도는 끊임없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신대륙 아메리카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광대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남쪽으로건 북쪽으로건 ‘인도양’―그들은 태평양의 존재를 전혀 몰랐으니까―으로 나아가려고 했으나 도처에서 뱃길이 막혔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길게 뻗은 대륙 아메리카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탐험대가 ‘통로’를 찾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에스파냐는 풍요로운 ‘인도양’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바로 이 때 무명의 마젤란이 몸을 일으켜 절대적 확신을 갖고 열정적으로 선언했다.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통로의 구체적 위치를 알고 있으니 함대만 지원해준다면 동에서 서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마젤란의 계획은 그 자체로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콜럼버스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추진했던 계획도 그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깜짝 놀랄 만큼 새로운 것은 그 ‘제안’이 아니라, 인도로 가는 서쪽 항로가 존재한다는 그의 ‘절대적 확신’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처럼 “어디에선가 이 통로를 발견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확신에 찬 어조로 그 통로를 발견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것이다. 그만이 그 통로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마젤란의 ‘절대적 확신’


그렇다면 과연 마젤란은 어떤 정보를 근거로 그처럼 자신만만할 수 있었는가.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는 오래 전부터 미지의 해로가 존재한다고 확신했는데, 그것은 독일의 지리학자 마틴 베하임(1459-1507)의 보고서를 접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마틴 베하임은 죽기 전까지 포르투갈 국왕의 지도제도사로 재직했었고, 마젤란은 지난날 포르투갈 왕을 위해 일할 때 왕궁 비밀서고를 출입하면서 베하임이 작성한 자료를 들춰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베하임의 자료에 의하면, 남아메리카의 남위 40도 부근에는 하나의 만(彎)이 있으며, 항해자들이 이틀 동안이나 그 만을 항해해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 결국 이 만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아내지 못한 채 폭풍에 쫓겨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베하임은 선원들의 보고에 근거해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인도양으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간주했고, 마젤란은 이 보고서를 신빙성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베하임이나 마젤란이 알지 못했던 진실, 즉 이 ‘통로’가 실은 남위 40도가 아닌, 그보다 훨씬 남쪽의 52도 부근에 놓여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남아메리카 최남단에 위치한 이 통로는 마젤란이 발견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마젤란해협’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베하임의 보고서에 나오는, 항해자들이 40도 부근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아메리카의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경계에는 라플라타 강이 흐른다. 이 강이 대서양으로 흘러가면서 바다처럼 넓은 면을 이루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강의 거대한 하구를 만이나 바다로 착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에서 한 번도 그와 같은 거대한 강물을 본 적이 없던 이 항해자들이 이 망망하게 펼쳐진 강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 숙원의 통로임에 틀림없다고 환호성을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하임의 보고서를 근거로 세계 일주라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을 때 마젤란은 잘못된 자료에 현혹되어 있었다. 그가 ‘절대적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비밀의 열쇠는 ‘오류를 진정으로 믿었고 진정으로 받아들였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누가 이 오류를 경멸할 수 있단 말인가. 시대정신에 부합되고 우연에 의해 인도되면 가장 어처구니없는 오류에서도 최고의 진실이 생겨날 수 있는 법이다. 수많은 중요한 학문적 발명, 발견들도 그릇된 가정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한 예로 화학(chemistry)도 중세의 마술적인 연금술(alchemy)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구의 크기를 엉터리로 계산해놓고 최단거리로 인도의 동해안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현혹시킨 토스카넬리의 지도가 없었더라면 콜럼버스는 대양으로 떠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정확한 베하임의 보고서를 마젤란이 바보처럼 우직하게 믿지 않았더라면 함대를 달라고 왕을 설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류에 모든 것을 걸고 바쳤기 때문에 그는 그 시대의 가장 큰 지리학적 비밀을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비옥한 오류’란 이를 두고 말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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